관찰일기02 : 제리

플링크팀 인터뷰 관찰일기 02 : 제리 (페이지콜 프로덕트 오너)

관찰일기02 : 제리
페이지콜의 아버지 제리

관찰대상 : 제리
관찰자 : 캡틴

창업할 때 본인은 대학 졸업 못해도 상관없다고 하던 라이언이 당시에는 믿음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못내 라이언의 남은 학업이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이왕 입학한 대학인데 잘 졸업하면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본인도 성취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창업하고 2년차가 되던 때 넌지시 학업을 병행하면 어떻느냐고 라이언에게 제안했다. 마침 사무실도 학교 바로 앞에 자리 잡았으니 꾸준하게 두 세 과목씩이라도 들으면 그래도 졸업할 수 있을테니.

공동창업자에게 미안한 마음, 너무 오래 학교를 떠나 있었어서 어색한 마음으로 한동안 복잡했던 라이언은 결국 복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복학하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오랜 시간 애정을 쏟았던 화학 전공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컴퓨터공학으로 전공을 변경하였다.

라이언은 학교 수업이나 과제에 아주 많은 시간을 쏟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정규 학기, 계절 학기를 신청해서 조금씩 학점을 채웠다. 그리고 늘 팀 프로젝트가 있는 과목은 우리의 지하 사무실에 팀원들을 불러서 했다. 지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카페보다 넓고 아늑하고, 밤새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컴퓨터공학 친구들이 방문했던 초기 플링크 사무실

그러던 중 하루는 라이언이 같이 운영체제 팀 프로젝트를 하는 친구 중에 한 명이 너무 똑똑해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마음을 비췄다. 물론 당시에 우리 팀은 누군가와 함께 하자고 할 만큼 형편이 좋지도 않았지만, 그 친구가 사실은 심리학 전공인데 컴퓨터공학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하여 마음이 살짝 시큰둥했다. 왜냐하면 나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 전공자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고, 또 한편으로는 인문계열 전공 학생이 공학 전공을 심도있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라이언이 저렇게 이야기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자연스럽게 식사나 해 보자고 제안했다.

"라이언, 그 친구 정말 똑똑하더라.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 사업 할 친구야. 포기하자"

처음 만난 제리는 온화 했지만 당당했다. 본인이 무엇을 잘 하고 어떻게 좋은 결과를 내는지 너무 잘 알았다. 어리숙한 대학생의 모습이 아니라 거장의 면모를 갖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인문계열 전공으로 대학을 입학했지만, 그것은 순서의 차이였을 뿐 공학적으로도 학업을 이어가는데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조금 대화를 하다보니 본인이 하고 싶은 일 들이 계획 되어 있었고 기필코 그것을 시작하여 도전하고야 말 것이라는 기세가 느껴졌다.

얼마 후 실제로 제리는 대학원 연구실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를 창업했다. 그나마 제리보다 내가 더 나은 점은 아주 조금 먼저 사업을 시작 해 보았다는 점 뿐이었고, 제리와 나는 주기적으로 가끔 안부를 물으며 투자나 세일즈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제리도 이제는 잊었을 5년 전 첫 카카오톡 대화

그 후 약 1년 뒤 2019년.

플링크는 막 시리즈A를 마무리 한 상황이었고, 제리와 대화는 반 년 이상 끊긴 상태였다. 그러던 중 라이언이 제리가 작년에 시작한 사업을 정리하고 있고, 조만간 IT대기업에 입사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침 투자를 받아서 자금이 있고, 또 페이지콜도 이제 막 두 번째 고객을 맞이하고 있던 중이었다.

라이언과 나는 제리를 만나서 회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만에 결정한 입사를 결정한 제리

"제리. 막 창업을 정리했을 시기여서 안정적인 선택에 끌렸을 것 같기도 하고 , 또 다른 IT대기업 입사하는 선택지도 있었을텐데 플링크를 결정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일단 라이언과 캡틴이 저에게 관심을 주셨기 때문에 제안 받았을 때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컸어요. 3개월을 할지 1년을 할지 10년을 할지는 결정할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일단 경험을 해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저는 원래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에 대해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었어요. 기록도 기록이지만, 학습의 방법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어요. 강의 내 소통이나 교육 효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제가 학창시절에 참여했던 연구 중 하나가 '유창한 강의'와 '유창하지 않은 강의'인 경우 각각 학생들의 학습효과에 대한 비교 연구였어요. 결론은 강의자가 유창한 강의는 학습자가 많이 배웠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강의 효과는 높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오히려 유창하지 않은 강의에서 학습자가 사실 중심으로 사고를 끊임없이 하게 되어서 오히려 교육적으로는 효과가 높게 나타난 것이죠. 플링크에서 제안이 왔을 때 학교에서 접했던 이런 경험들이 생각났어요."

제리는 플링크에 합류하여 약 4년간 페이지콜 2.0 개발과 런칭을 리드하며 엔지니어링 측면 뿐 아니라 팀 문화 측면에서도 회사 성장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별히 2021년에 제리가 페이지콜 엔지니어링 팀원 각각의 개인 업무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보상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꾸준하게 시행한 것을 정말 높게 평가한다.

대표로서 보상을 결정하는 문제는 늘 어렵다. 특히 나는 비개발자로서 개발자들의 업무의 난이도를 이해하고 결과물의 탁월함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래서 나는 줄곧 새로 입사하는 개발자들의 보상을 결정할 때 주로는 과거 직장에서 받았던 연봉을 고려하여 책정하고, 신입들은 일단 미리 정한 신입 연봉으로 제안하고 입사 후 업무들에 대해서 라이언의 의견을 고려하여 적절히 경력직과 차등을 두어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엔지니어의 수가 15명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면밀하게 업무 결과물의 완성도를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황 속에서 2021년 엔지니어 임금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상승하면서 외부 업체로부터 채용 제안을 받은 엔지니어들이 플링크로부터 카운터 오퍼를 기대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시장 상황에 맞추어 임금을 조정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기준과 정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외부에서 오퍼를 받은 팀원은 임금이 조정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정체하는 것도 옳지 않고, 또 외부에서 일정 금액을 오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무한정 카운터 오퍼 금액을 높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팀은 엔지니어 직무의 보상을 기존보다 전체적으로 인상하되, 개인들의 업무를 최대한 올바르게 평가부터 할 수 있도록 제리가 준비하기로 했다.

제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획득할 수 있는 약 20여개의 미국 기술 회사들(Basecamp, Kisckstarter, CircleCI, Spotify 등) 의 엔지니어 평가 항목들을 모으고 그 안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류하여 엔지니어 평가를 위한 큰 항목들을 구성했다. 그리고 기존 플링크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좋은 엔지니어'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의견을 모으며, 또한 회사의 핵심가치 측면에서 평가 항목들이 반영될 수 있도록 세부적인 조정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없던 평가 시스템은 팀원들에게 부담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취지와 진행 과정에 대해서 플링크 전체 모임에서 상세하게 공유를 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역시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기에 단계적으로 도입된 후 피드백 과정을 거쳐 평가 항목들이 꾸준하게 개선될 것임을 알렸다.

이러한 과정 후에 제리는 크게 Technical Skills (어려운 문제를 정확하고 빠르게 풀어내는 능력), Get Stuff Done (추상적인 문제로부터 안정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 Impact (주도적으로 비즈니스를 발전시키려는 시도), Communication&Leadership (독립성과 동료성장의 정도)의 네 개 영역에서 각각 레벨 1 ~ 레벨 4까지 충족시켜야 하는 세부 항목 문장들을 완성하고 공개하였다.

제리가 플링크 엔지니어 평가표 일부

그리고 평가하는 특정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서 평가 결과가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자기평가서'를 스스로 작성하고 -> 본인이 선택하는 희망평가자 2인을 선택하여 평가를 받고 -> 최종적으로 평가 총 책임자(지금은 제리)가 모든 평가 결과를 리뷰하여 평가가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이 평가가 단순히 시험같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이 평가서를 기준으로 지속적으로 리더들에게 성장 방향성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직무에 대한 지침을 요청하도록 운영하였다.

평가를 위하여 본인이 진행하였던 업무를 작성하는 '자기평가서'

제리가 2021년 3분기에 처음 설계하여 시작한 '엔지니어 역량평가' 제도는 현재 2022년 4분기 평가까지 총 여섯 분기 째 플링크의 평가 제도로서 완전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매 평가를 진행하며 평가 항목이 조정되거나 일부 세부 항목의 문장이 변경되는 점은 있었으나 큰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2022년 하반기부터는 디자이너, 비즈니스 직군까지 확대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페이지콜 비밀결사단 제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플링크는 지금까지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겪었다. 목표한 것이 그대로 달성되는 짜릿한 경험보다는 늘 아쉬운 결과를 본 적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외부에서 좋은 입사 제안도 많이 받았을 제리가 플링크에서 4년째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디서 본 글귀인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회사는 일종의 비밀 결사라고 하더라고요. 플링크는 저에게 대한민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우리만의 비밀 결사이자 삶의 터전이에요.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집단이잖아요. 서로 생각이 달라도 같이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위하여 여러 뛰어난 동료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것 같아요."

제리의 대답을 듣고 나 역시도 뭔가 고달프게만 느껴졌던 창업의 과정 전부가 갑자기 남들 몰래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비밀 결사단처럼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