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일지01 : 페이지콜의 시작

창업일지01 : 페이지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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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4일.

물론 첫 시작부터 페이지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2015년 2월 14일이 모든 일의 시작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맘대로 2015년 2월 14일을 페이지콜의 시작점으로 잡은 것은, 그 날 내가 지금의 페이지콜이 될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라이언과 나는 대학교 시절 생물학 실험의 같은 조원이었다. 당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던 나에게 생물학 실험은 어색한 실험용 흰색 가운, 이상한 약품 냄새와 함께 참 불편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파릇파릇한 과학고 출신의 신입생이었던 라이언은 매 주 실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신속, 정확한 실험을 수행한 후 조원들에게 결과 데이터 공유까지 알아서 해 주는 완벽한 팀원이었다. 약간은 귀찮은듯 무심하게 실험을 혼자 쭉쭉 진행을 한 후, 두 말 없이 오늘 실험의 결과를 정리까지 해 주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위엄을 느꼈다.

라이언은 화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내가 하고 있던 경영 전공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본인이 나중에 사업을 할거라고 하기도 하고, 방학동안 친구하고 게임을 만들거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나고, 전공도 달랐던 우리는 가끔 싸이월드를 통해서 안부만 확인하며 지내는 정도의 사이였는데 그러다가 그는 어느날 갑자기 군대를 간다고 메시지를 주고서는 휙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그냥 학교 수업에서 스쳐 지나간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군대를 가 있는 사이 나는 대학교 졸업을 했고, 창업을 했고, 그리고 망했다.

그리고 남겨진 생활빚. 그리고 시작된 수학 학원 강사 생활 4개월차.. 그런데 갑자기 2015년 2월 14일 그 때, 라이언에게 연락이 왔다.

"형 저 화상과외 서비스 사업을 할거에요"


2015년 3월쯤 어느날.

아침 9시 반쯤 기상. 아침 10시에 헬스장, 그리고 12시쯤 분당에 도착.

정자동에서 느긋하게 햇살 받으며 점심 먹고, 커피도 한 잔 하고, 느긋하게 시간 보내다 오후 2시까지 학원 출근.

2시부터 4시까지는 오늘 등원하는 학생들 확인하고 수업 준비와 학부모 상담. 4시부터 두 시간씩 세 번 수업.

10시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11시 반. TV보다 숙면. 그리고 또 같은 하루.

이것은 어느덧 익숙해진 이름 없는 학원 강사로서 삶이었다.

무명 수학 강사 시절

월 1회 혼자서 풍족하게 살 수 있을만한 월급은 잘 들어왔고, 그래서 행복했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도 "분당에서 수학 학원 강사입니다"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나 자신 스스로 '수학 강사'로서 정체성을 잘 받아들였다. 학생 수도 꾸준히 늘어났고, 보람도 있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하여도 내 삶의 전부였던 스타트업은 대학 시절 했던 아련한 동아리 활동처럼 잊혀 가는 듯하였다.

2013년 글로벌 창업지원 사업 발대식에서 당시 함께 창업했던 친구들과

2013년, 지금은 볼드모트같이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그' 스타트업의 시작은 꽤나 괜찮은 출발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기 전부터 정부의 창업 지원사업에도 바로 선발이 되고, 지원 사업이 끝날 시기에 맞춰서 개인 투자자로부터 엔젤투자 치고는 꽤나 많은 투자금을 계약했다. 당시 새로운 대통령의 '창조경제' 시범 대상으로서 많은 혜택을 지원받았고, 한 달에 한 번씩 외국 출장을 왔다 갔다 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 십억, 많으면 수 백억씩 투자를 받아 한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나도 '밀리언 달러' 투자를 곧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한 번 가보기 힘들던 미국을 한 달에 한 번씩 갔다

하루에 잠을 거의 4~5시간씩 밖에 자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창조경제의 주역, 스타트업의 루키는 그렇게 매일 실리콘 벨리에 진출할 꿈을 갖고 열심히 일 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처음 시작한 사업이 술술 풀려가는 것 같았던 느낌도 잠시...

매출도 없이 외부 투자에 의존하고 있던 사업체는 추가 투자에 실패하고나니 가지고 있던 자금은 점점 소진되고, 팀원들은 하나씩 팀을 떠났다. 최후 3개월은 나 혼자 남아 버텨보려고 하였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실패의 기운을 전환하기엔 나는 너무 경험이 없었고, 약했다.

스스로 폐업할 용기조차 없어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사라져서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폐업 신고를 겨우 했다. 스타트업 루키 놀이를 끝내고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고나서 주변을 보니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숨만 쉬고 있어도 괴로웠고,그렇게 처절하게 고독과 절망감을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금방' 새로운 스타트업을 다시 구상하고, 다시 팀원과 투자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이 상황은 '금방' 끝이 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금방'이라고 믿었던 무기한 휴가는 정말 무기한으로 길어졌다. 밤 시간이 되면 내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세상의 산소를 소진하고 이산화탄소만 늘려놓고, 오폐물만 배출하는 것 같았다. 그 어느 조직에서도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라는 정답 없는 의문이 몇 달 동안 내 마음속에 둥둥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나 자신을 다시 보듬고 주변에 대한 분노를 잠잠케 하는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

그리고서 겨우 시작했던 일이 수학강사였고, 학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아하는 일을 시작 하였고 비로소 삶이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심지어 이렇게 평생 살아가는 것도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스타트업같이 위험한 도전은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나는 주변의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을 뜯어말리는 전도사였다.


2015년 4월 어느날 서울대입구 커피빈.

그렇게 비로소 평화를 찾은 나에게 찾아온 라이언은 꽤나 진지했다. 식사를 하며 본인이 그동안 화상과외 서비스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임금체불을 당했다고도 했고, 그 임금체불 소송의 대표라고도 했다. 노무사와 조율 중이라는 이야기도 했고, 같이 임금체불 당한 선생님들과 창업을 위한 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화상과외업체 B업체, 서울대생 167명 임금 체불해
유명 온라인 화상과외업체 B업체에서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강사와 직원이 500여 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서울대생 피해자는 167명에 이른다. 현재까지 집계된 강사 200여 명의 피해액만 1억 2000만 원으로, 1인당 평균 60만 원 정도의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B업체는 “경영 악화로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어 자금이 동결됐다”며 “현재는 체불 임금
라이언이 겪은 사건에 대한 실제 언론 보도

당시 내 상황은 막 폐업을 한 상태인지라 창업을 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권장할 수 없는 정신상태였다. 라이언의 창업의 이유가 어떻든, 무슨 아이템을 생각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잘 안 될 것이니 '하지 말라'고 말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척척 사람들이 돈 내지도 않고,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돈 나갈 곳이 많다. 그렇게 쉽게 부자되지 않는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라이언도 밥을 먹으면서 일단 화상과외 사업을 시작 하기 위해서 초반에 필요한 비용들을 나와 함께 계산 해 보았고, 또 신경써야 할 경영의 변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생각보다 행정적으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된 라이언은 조금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