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일지04 : 보호막이 없어진 꽃
TIPS 지원급 5억원은 선발 당시 창업 3년차였던 우리 팀에게 많은 돈이었다.
덕분에 채용에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원하는 팀을 구성 해 볼 수 있었고, 이런 저런 PMF를 찾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다. 아마 TIPS가 없었다면 2019년이 되기 전에 폐업을 했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부끄럽지만 조금 노골적으로 다시 서술하자면 우리 비즈니스 모델로 보았을 때 2019년 전에 무조건 망해야 할 회사였는데 TIPS 때문에 살아남았다.
정부지원금은 보통 신규 고용 인건비에 쓰기 용이하게 되어있다. 국가의 세금으로 창업팀을 지원하는 것이니 사람 많이 뽑아서 회사를 키울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협약시에 예산 항목 중 신규 고용 인건비 항목에 전체 사업비 중 약 40%에 해당하는 2.5억원을 할당하였다. 2년간 2.5억원이기에 1년에 약 1.25억 수준이니 TIPS 하는 동안 3인 정도 추가 고용하는 수준으로 그렇게 많이 할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타이밍에, 어떤 직무를, 어떤 경력을 갖춘 사람을, 어느정도의 보상을 하며 모셔야 하는지 전혀 경험이 없던 나는 면접을 봐서 좋은 사람같다는 생각이 들면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채용을 너무 많이 했고, 2017년 TIPS 협약 전에 7명이었던 팀은 2019년 1월에 14명으로 딱 두 배가 되어있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첫 사무실이었던 지하 사무실이 좁아지게 되어서 사무실도 확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엔지니어 뿐 아니라 디자이너, 마케터도 있는 그럴싸해보이는 5년차 회사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팀은 외형 확장을 하며 지출이 지속적으로 느는 실속없는 공회전을 하고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당시 페이지콜 API의 유일한 고객사였던 화상과외 서비스는 투자를 받아 서비스를 크게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2018년 겨울에 대히트작이었던 스카이캐슬에 스폰서 광고를 넣게 되면서 겨울방학 성수기에 맞추어 사용량이 수직으로 증가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객사가 내는 페이지콜 API 사용료로는 14명이나 되는 팀을 유지하기에는 택도 없었고, TIPS 지원금도 반 년 뒤에는 끊기기 때문에 나는 투자를 받아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2019년 1월. 참 추운 겨울이었지만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 20개 투자사를 만나서 페이지콜을 소개했다.
"대표님. 우리나라는 직접 찾아가서 인사하고 이야기하는게 예의에요. 온라인이 되더라도 직접 가야해요"
"Zoom이요? 그게 뭐에요? 세콰이어 투자 받고 상장했다고요?"
"이런 특수한 영역에서 역할하는 소프트웨어는 투자 절대 못 받아요."
사실 2017년에 프라이머, 스트롱벤처스, 스프링캠프에게 받았던 투자는 감사하게도 대부분 처음 회사를 소개하고 일주일 안에 투자를 결정 해 주신 덕분에 큰 고생하지 않고 자본을 유치했었다. 그리고 대부분 2017년 투자는 운영하던 화상과외 서비스 매출과 팀, 그리고 시도하는 기술의 방향성 정도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우리가 가고자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부정을 당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 나는 대표로서 바야흐로 시리즈A라는 정규 라운드를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고, 나는 우리 서비스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처음 들어보게 된 것이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 실로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나와 팀이 5 년간 너무 맞다고 생각한 미래의 방향성에 너무 틀리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되니 소름이 끼쳤고 갑자기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당시에 그런 상황 가운데 내가 정말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프링캠프의 남홍규 부대표님(현 끌림벤처스 대표님) 덕분이었다. 스프링캠프는 일찌감치 이번 시리즈 A 투자에 프로라타(기존 투자사가 새로운 투자가 들어올 때 지분율이 희석되지 않고 유지하는 정도로 신규 투자를 함께 하는 것)투자를 해 주시기로 한 상태였는데, 그러다보니 나는 투자사와 미팅이 끝나면 공유를 해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신규 투자사와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으니 투자사 미팅 후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스프링캠프 사무실에 들러서 미팅에서 느꼈던 분노함, 아쉬움, 굴욕감을 남홍규 부대표님과 이야기했다. 때로는 회사 그만할거라고, 때로는 투자 없이 보란듯이 성장할거라고 매 번 방향성 없이 폭주하는 나에게 인내하고 더욱 집중하도록 다독여서 사무실로 돌려 보내셨다.
그렇게 대부분 이들이 페이지콜의 미래를 안 될 것이라고 거절하던 중, 그래도 꾸준하게 미팅을 요청 주신 팀이 있었다. 그 팀은 바로 비하이인베스트먼트의 서성원 팀장님(현 프롤로그벤처스 이사님)이었다.
사실 이후에 2개월간 페이지콜, 스프링캠프, 비하이인베스트먼트간의 협의과정은 너무 어려웠다. 정말 서성원 팀장님, 남홍규 부대표님, 나 중 셋 중 하나라도 "굳이 이렇게까지 힘들게 진행해야하나"라는 회의감이 들면 무조건 모든 과정이 깨질 수 밖에 없는 살얼음같은 상태가 몇 주 이어졌다.
서성원 팀장님은 페이지콜의 미래에 대해서 나를 대신해서 비하이인베스트먼트 내부 구성원들을 설득해야했다. "굳이 온라인 기술을 이렇게 초기에 이 가격에 투자를 해야하냐"라는 이야기를 아마 서성원 팀장님도 극복하기 위하여 나 만큼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남홍규 부대표님은 비하이인베스트먼트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계속 스프링캠프 내부 의견 조율을 해야만 했다. 밸류에이션과 투자액이 바뀌거나 계약서 조항 바꿀때마다 계속 협의를 해야만 했는데, 부대표님은 정말 묵묵히 투자가 잘 마무리 되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두 분에게 약속한 미래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무실 현장에서 매일매일 라이언과 일하면서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3개월에 걸친 살얼음같던 논의는 4월 19일에 비로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뒤 이어 9월에 비하이인베스트먼트 덕분에 한국벤처투자의 매칭펀드도 선발이 되어 추가로 투자를 받게 되어 총 15억원으로 시리즈 A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페이지콜은 2년간 뒤집어쓰고있던 TIPS라는 보호막을 벗고 비로소 야생으로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