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일지09(完) : 말하는대로

창업일지09(完) : 말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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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지난 몇 개월간 투자사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다.

대학생 창업 경진 대회에 하나쯤은 늘 나오는 뻔한 입시 과외 서비스를,
사업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저냥 1년 조금 넘게 운영하고 있는 팀.
다만 약간 특이하다면 화상으로 과외를 한다는 것인데,
성장할 시장은 아닌 것 같은 서비스. ‌‌

이 정도가 우리의 모습이었을 것 같다. 한 번은 자기는 자식들 과외를 온라인으로 절대 안 시킬 것 같고, 심지어 우리 서비스 이름도 촌스럽다고 윽박지르던 심사역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가 택한 산업과 기술의 방향성이 투자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린 '스타트업'이 아니라 그냥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 바이블의 저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괜스리 바쁜 '와튼' 출신 대표님의 시간을 뺏는 것 같은 오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저한테 오늘 시간이 얼마나 책정되어 있나요...?"

삼면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모두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압박감을 주는 구글캠퍼스의 한 회의실에 앉자마자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길면 30분 정도를 예상하고 있던 나에게 배기홍 대표님은 한 시간정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변을 하셨다.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어서 놀랐고, 화상과외 서비스와 기술 개발 모두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기홍 대표님은 우리가 만든 화상과외 솔루션을 보시더니 '쭘'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서는 본인이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스카이프보다 "쭘"을 요즘 많이 쓰는데 "쭘"이 얼마나 불편한지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리고선 "쭘"이 최근에 "세콰이어" 캐피탈에서 1,000억 원을 투자 받았다고,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기술이 성장하는 산업의 기술이라고 이야기 하셨다. 그런데 정작 나는 "쭘"이 뭔지를 몰라서 "아 그렇군요~" 하고 대답만 했다.

그래도 밀도있게 이야기를 나눴고, 기분 좋게 악수하고 배기홍 대표님과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리고선 "쭘"이 뭔지를 찾아보니 미국의 Zoom이라는 서비스를 지칭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정부지원사업 지원서를 쓸 때 시장조사를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이렇게 동종업계의 큰 회사를 창업한지 2년 동안 모르고 있었다니... 괜히 오늘 미팅의 결과가 불안해졌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다음 프라이머 후속 미팅 제안을 받았고, 온라인으로 이기하 대표님과 권도균 대표님과 30~6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선 거의 곧 바로 TIPS 연계 투자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투자 제안을 받고 나는 라이언과 타미에게 혹시 지금 투자를 받지 말고 조금 더 버텨보면 어떻느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투자 금액이 '억' 이 되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경험이 없기에 앞으로 나가기 두려웠고 나는 주저했다. 그렇게 미지의 영역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나를 자연스레 이끈 것은 라이언과 타미였고, 결국 우리는 2017년 4월 첫 기관 투자를 계약했다.

(참고) 위 금액은 프라이머의 TIPS 연계 투자 조건으로 정규 투자 금액과 차이가 있습니다. + 잔액을 보면 투자를 미루자고 할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2017년 5월 그렇게 라이언이 노래 부르던 TIPS 도 선발이 되었고 6월에는 수 백 명의 사람들에게 회사 소개를 하는 프라이머 데모데이도 잘 마쳤다.

데모데이날 우리 셋
Cisco, Zoom 비켜! 

창업 시작할 때 가졌던 목표가 '벤처인증 받아서 타미 군대 미룰 수 있으면 좋겠다', 'TIPS 되었으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2년만에 원하던 것들이 '말하는대로' 다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젠 투자도 받고 TIPS 도 선발되었으니 앞으로 쭉쭉 나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늘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우리는 작은 성공 뒤 지독한 광야 생활로 빠져들게 되었다.


2017년 6월

여러 어려움 끝 TIPS에 최종 선정이 되었다. 참고로 TIPS는 Tech Incubating Program for Startup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술개발 R&D 자금 지원 프로그램이다. TIPS 운영사로 선정된 투자사가 1억원을 투자하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매칭하여 5억원의 R&D 자금을 2년간 지원한다.

당시 월 지출을 2,000 만 원 정도 하고 있던 우리 팀에게 5억 원은 정말 큰 돈이었고, 이제 어려운 시절을 넘어 드디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자금이 확보 되어 있을 때 과감하게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으로 피봇을 결심했다. 이에 직접 운영하고 있던 화상과외 서비스는 2017년 9월 가장 잘 운영 해 줄 것 같은 팀에게 무상으로 양도했고, 우리 팀은 화상과외 서비스를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서 정말 멋진, '쭘'을 이길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2023년 지금의 내 마음...

감사하게도 이러한 과감한 기술 개발 도전의 방향성을 '스프링캠프'라는 투자사와 프라이머에서부터 함께 했던 배기홍 대표님의 'Strong Ventures'에서 17년 11월 5억 원 투자로 응원 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PC방의 전자음과 세탁방의 소음을 피해서 드디어 지상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이후 이야기는 현금 5억 원, R&D 지원금 5억 원을 가지고 야심차게 골드 러쉬를 떠났던 우리가 광야에 빠져들어 수 년간 헤어나오지 못한 스토리이다.

그리고 5년이나 지나서 회사 블로그에 연재를 해 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17년부터 이어진 광야가 2023년 4월까지 이어졌는데, 그러다보니 내 관점에서 과거의 나와 팀을 조망하며 편하게 쓸 수 있는 내용이 잘 없었다. 늘 실패한 이야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창업일지는 창업자 세 명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고, TIPS 이후엔 여러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다른 팀원들과 연계되어 있어서 맘 편하게 서술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3년 4월에 회사 이름을 변경하고, 국내외에서 PMF를 찾아 약 7년의 광야 생활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거쳐온 일 들을 정리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 블로그에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페이지콜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 이유와, 팀이 생각하는 교육 산업의 디지털 전환에 대하여 새로운 시리즈를 연재 할 계획이다.